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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는 동의가 아니다 — 원효의 화쟁이 알려주는 소통법

2026. 8. 6. 16:05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이런 생각해 보신 적 있나요?

“저 사람은 상황을 너무 모르는 것 같아.”
“정작 중요한 게 뭔지 모르네.”
“내 말귀를 잘 못 알아듣고 자기 할 말만 하네.”

 

상대가 핵심을 놓쳤다고 느끼는 순간, 대화는 문제 해결보다 자기 관점을 관철하는 싸움이 되기 쉽다.
(출처: AI 생성 이미지(ChatGPT 활용))

 

회의에서 일정이나 업무 방식에 관한 의견이 부딪힐 때도 이런 생각이 쉽게 듭니다.

 

개발팀은 현실적으로 구현 가능한 범위와 일정을 이야기하고,

기획팀은 고객이 요구한 기능이 제대로 동작하면서도 고객이 요구한 일정에 맞추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각자는 자신이 보고 있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상대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핵심을 놓치고 있다고 판단하곤 합니다. 

 

가족과 친구 간의 대화에서도 비슷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상대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살펴보기보다 답답함을 느끼고, 어느새 대화의 목적을 잊고 자신의 생각을 이해시키는 데 더 집중하게 됩니다.

 

원효는 이럴 때 상대의 관점부터 살펴보라고 권합니다.
서로 다른 주장들이 각각 무엇을 설명하고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살펴보라고 말합니다.

 

각 입장의 부분적인 타당성을 인정하면서 더 넓은 해결의 길을 찾는 사유가 원효의 ​화쟁(和諍)입니다.

 

 

화쟁을 탄생시킨 원효대사

화쟁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화쟁을 탄생시킨 원효라는 인물에 대해 아는 것이 좋습니다.

 

원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유명한 승려이자 우리나라 최고의 철학가로 꼽히는 불교 사상가입니다.

그는 당시 동아시아에 전해진 여러 불교 경전과 학설을 폭넓게 연구했습니다. 원효가 활동하던 시대의 불교에는 하나의 통일된 설명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경전마다 깨달음, 수행,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는 방식도 달랐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생산적인 토론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어느 경전과 학설이 더 우월한지를 둘러싼 의미 없는 논쟁을 낳기도 했습니다.

 

원효는 한 학파의 편에 서서 다른 학파를 공격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각 학설이 성립하는 전제와 문제의식을 검토하고, 서로 다른 설명들이 반드시 절대적인 모순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밝히려 했습니다. 화쟁은 이러한 불교 내부의 교리적 충돌 속에서 서로 대립하는 논쟁과 이론들을 화합하려 했던 원효의 시도입니다.

 

 

화쟁(和諍)이란 무엇인가? 원효가 말한 소통의 철학

화쟁은 ‘화할 화(和)’와 ‘다툴 쟁(諍)’으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조화시키면서 싸운다고 하니까 모순되는 두 개념이 한 군데 섞여있는 단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화쟁은 서로 다른 의견을 강제로 하나로 만들거나 논쟁을 중단하는 것 아니라 논쟁을 충분히 하면서 각 주장이 무엇을 말하는지, 어떤 전제 위에 서 있는지, 어느 범위에서 타당한지를 세밀하게 살피는 행위입니다.

 

화쟁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주장들이 알고 보면 같은 대상이나 문제를 바라보면서 서로 다른 관점과 차원에서 말하고 있다는 통찰입니다.

같은 대상이나 문제도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다르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을 온전하게 이해하거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좋은 해결책을 찾으려면 서로 다른 관점을 통합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물을 예로 들어 보면, 물은 마실 수 있는 액체라고 설명할 수도 있고, 수소와 산소로 이루어진 물질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흐르는 강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생명 유지에 필요한 조건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 설명들은 서로 다르지만 하나가 옳다고 해서 나머지가 틀리지는 않습니다. 각각 다른 질문과 목적에 답하기 때문입니다.

 

화쟁은 이렇듯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이해해 보려는 시도이지만 나의 관점을 포기하고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화쟁은 나와 다른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바라볼 때 각자의 경험에 비추어서 일부만 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서로 다른 시선들을 조화시켜서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나은 방향을 찾으려는 노력입니다. 


오늘날의 소통 관점에서 본다면, 화쟁의 출발점은 상대의 관점과 조건을 먼저 이해하려는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같은 물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 화쟁은 각 관점의 타당성을 살피며 더 온전한 이해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출처: AI 생성 이미지(ChatGPT 활용))

 

 

일상에서 화쟁을 실천하는 방법

화쟁은 구체적인 행동 지침이라기보다 추상적인 개념에 가깝기 때문에, 처음 접하면 그저 입바른 소리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런 인상을 받았고, 화쟁을 실제 삶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고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처럼 단번에 상대방의 입장에 공감할 수 있고 화쟁을 실천할 수 있게 되는 속 시원한 비법은 없습니다.

평상시에 마음속에 항상 화쟁을 실천하겠다는 마음을 품고 부단히 노력하는 평범한 방법만 있을 뿐입니다.

그중 우리가 시도해 볼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상대의 주장을 맥락과 조건 속에서 이해하기

현대 화쟁 연구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방법은 상대의 견해를 조건문으로 읽는 것입니다.

화쟁 연구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부분적 타당성, 즉 ‘일리’입니다.

견해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버리는 대신, 그 안에서 수용할 부분과 비판할 부분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언어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

원효의 화쟁 방법에 관한 연구에서는 언어의 한계를 인지하는 것도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언어는 진리를 온전히 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리키는 수단이므로, 표현의 표면에만 매달리지 말고 그 말이 가리키는 뜻을 살펴야 합니다.

같은 말도 사람마다 다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사용한 단어만 붙잡기보다, 그 말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를 물어보고 이해하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판단을 미루고 질문하기

제가 제시할 수 있는 한 가지 평범한 방법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해 곧바로 판단을 하기보다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이때 질문은 상대를 몰아붙이거나 논리의 허점을 찾기 위함이어서는 안 됩니다. 상대가 어떤 전제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질문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일정을 두고 개발팀과 기획팀이 부딪힐 때, “왜 이렇게 무리한 일정을 잡느냐”라고 하기보다 “이 일정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라고 먼저 물어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기획팀에서도 “왜 안 된다고만 하느냐”라고 몰아붙이기보다 “현재 일정에서 가장 큰 기술적 위험은 무엇인가요?”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누가 옳은지를 당장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개발팀은 품질과 안정성을 중요하게 보고 있을 수 있고, 기획팀은 고객과의 신뢰나 사업 일정을 우선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주장의 배경을 확인하면 단순히 ‘무리한 요구’와 ‘소극적인 대응’의 대립으로 보였던 상황이, 서로 다른 책임과 조건에서 비롯된 문제였음을 알게 될 수 있습니다.

 

상대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핵심을 놓치고 있다고 느껴질 때, 나 역시 핵심을 놓치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문제의 전부가 아닐 수 있고, 상대는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다른 부분을 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를 기억하고 있다면 나와 다른 의견을 마주했을 때 그에 대한 판단을 미루고 질문을 통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래 질문들은 나의 관점을 되돌아보고, 상대의 주장이 어떤 맥락과 전제에서 나왔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화쟁의 질문들입니다.

 

  1. 상대의 입장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한 질문
    • 상대가 실제로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 내가 상대의 의도를 정말 정확히 이해했는가?
  2. 대립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살피는 질문
    • 서로 다른 상황이나 관점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이 대립은 진짜 모순인가, 아니면 강조점의 차이인가?
  3. 각 입장의 타당성을 살피는 질문
    • 이 주장이 성립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 내 입장에도 한계나 맹점이 있지 않은가?
  4. 공통 기반을 찾는 질문
    • 서로 다른 주장 뒤에 공통된 목적이 있는가?
    • 어느 부분까지는 합의할 수 있는가?
  5. 더 넓은 관점으로 나아가기 위한 질문
    • 두 입장을 모두 포괄하는 더 큰 관점이 가능한가?
    • 하나의 답만 참이어야 한다고 전제할 필요가 있는가?

 

 

회의에서 바로 써먹는 화쟁 체크리스트!

앞에서 살펴본 화쟁의 질문들을 회의 상황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도록 세 가지 질문으로 간단히 정리해 보았습니다.

□ 상대는 이 의견을 통해 무엇을 지키거나 해결하려 하는가?
□ 우리의 공통 목표는 무엇인가?
□ 각 입장의 타당한 부분을 함께 반영할 수 있는 제3의 방법은 없는가?

 

물론 이 질문들을 던진다고 해서 언제나 합의에 도달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상대의 말을 틀린 주장으로 단정하기 전에 그 말이 나온 조건과 이유를 살펴본다면, 더 나은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서로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무엇이 다른지 더 정확히 알 수 있고, 동의할 수 있는 범위와 끝내 양보할 수 없는 지점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화쟁의 목적은 각자가 보고 있는 부분을 함께 펼쳐 놓고, 혼자서는 보지 못했던 문제의 전체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데 있습니다.

 

서로 다른 맥락과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이 질문을 주고받으며 더 온전한 이해에 다가가는 모습
(출처: AI 생성 이미지(ChatGPT 활용))

 

 

화쟁을 실천할 때 주의할 점

화쟁은 서로 다른 입장을 이해하고 갈등을 더 깊이 바라보게 해주는 유용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화쟁이 각 주장에는 부분적인 타당성이 있다고 강조하듯, 화쟁 자체도 언제 어디서나 적용할 수 있는 만능의 해법은 아닙니다. 모든 갈등을 화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문제의 본질을 흐리거나 부당한 상황을 정당화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화쟁을 무조건 실천해야 할 원칙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어떤 상황에서 화쟁이 유효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다른 판단과 행동이 필요한지 스스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해와 타당성의 인정은 다르다

화쟁은 서로 대립하는 주장 속에서 각각의 일리를 찾으려는 사유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주장에 반드시 타당한 부분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거나, 타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정당화하거나, 근거 없이 거짓 정보를 퍼뜨리는 주장까지 대등한 의견으로 취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과학적 근거에 기초한 주장과 검증되지 않은 음모론을 같은 무게로 취급한다면, 사실과 거짓의 차이가 흐려질 수 있습니다. 상대가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주장의 내용까지 타당하다고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를 이해하는 일과 주장의 정당성을 평가하는 일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대화가 안 되는 상황도 있다

화쟁은 상대도 어느 정도 대화에 참여할 의지가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거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화하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상대가 계속해서 사실을 왜곡하고, 질문에 답하지 않으며, 모욕과 위협을 반복한다면 질문과 공감만으로 관계를 개선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끝없이 상대의 맥락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오히려 자신의 감정과 안전을 희생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대화를 중단하고 거리를 두거나, 명확한 기준과 경계가 필요합니다. 상대를 이해하려는 태도와 부당한 행동을 허용하지 않는 태도는 동시에 가질 수 있습니다.

 

공감 이후에는 판단과 행동이 필요하다

화쟁의 핵심 출발점을 공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공감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충분히 이해했더라도 실제 문제를 바꾸기 위해서는 판단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결국 양자택일의 문제에서 분명한 의사결정을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이해와 조화만을 강조하면 결정을 필요 이상으로 미루게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화쟁은 행동을 대신하는 태도가 아니라, 더 신중하고 정당한 행동을 하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상대의 관점을 충분히 살피되, 필요한 순간에는 빠르고 구체적인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마치며

화쟁은 모든 갈등을 없애거나 서로 다른 의견을 하나로 만드는 방법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끝까지 이해한다고 해서 반드시 동의하게 되는 것도 아니며, 때로는 분명하게 반대하고 단호하게 행동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화쟁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판단과 행동에 앞서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전부인지 한 번 더 돌아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화쟁을 실천하기 위해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설명만으로 물의 모든 모습을 담을 수 없듯이, 한 사람의 시선만으로는 전체를 온전히 볼 수 없습니다.

내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상대가 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상대의 생각에 호기심을 갖는 태도에서 화쟁은 시작됩니다. 물론 언제나 완벽하게 공감할 수는 없고, 모든 대화가 좋은 결론에 이르지도 않습니다. 다만, 이해하려는 마음을 꾸준히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서로를 조금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입니다.

마음속에 상대를 이해하려는 여지를 남겨두고, 우리도 일상 속에서 천천히 화쟁 해보면 좋겠습니다.

 

 

참고자료

 

 


EDITOR

박범수

AI Multi Modal Cell · Junior Researc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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